회화라는 미지의 공간 정희민 작가 인터뷰
글: 정송(아트 칼럼니스트), 에디터: 김수진
정희민은 디지털 이미지에서 출발한 감각을 물질적 층위와 표면의 시간으로 번역하며 회화를 구축해 왔다. 그녀에게 재료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감각을 고정시키고 밀도를 형성하는 하나의 언어로 작동한다. 결과적으로 한 점의 회화는 화면의 경계를 넘어서는 넓은 공간으로 확장된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디지털 이미지가 불러오는 감각을 화면 위의 물질적 경험으로 전환해 온 과정, 이러한 감각을 처음 작업에 도입하게 된 계기, 그리고 이후 재료 실험이 확장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재료가 단순한 물성을 넘어 감각을 지탱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느껴지는 순간부터 작업이 변화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접근은 11월 말 타데우스 로팍 서울에서 열린 작가의 개인전 《번민의 정원》에서도 이어진다.
정희민은 이번 전시의 출발점으로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The Slave Ship)〉(1840)이 남긴 여운을 언급한다. 작가는 이 작품이 강렬한 빛과 색채로 이루어진 서정적 풍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종(Zong)’호 사건—보험금을 목적으로 노예를 바다에 내던진 비극—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터너는 이 폭력적 사실을 화면에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서정성과 잔혹함이 충돌하는 간극을 남기는데, 작가는 바로 그 긴장이 강렬했다고 회상한다. 이러한 감정의 진폭은 전시 제목 《번민의 정원》에도 이어진다.
작업 과정에서 화면의 공간은 어느 순간 작가 자신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고 한다. 어떤 때는 무한히 확장되는 열린 세계처럼 보이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그 ‘끝없는 확장’이 오히려 잔혹한 감각으로 변해 혼란을 불러오며, 마치 림보와 같은 상태로 다가오기도 한다. 작가는 이러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가장 정확하게 포착하는 단어가 ‘번민’이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