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윤리 거리의 윤리

거리의 윤리

24 February—2 May 2026
Seoul Fort Hill
/

Overview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2월 24일부터 5월 2일까지 한국, 일본, 필리핀 출신의 작가 4인의 신작을 선보이는 단체전 《거리의 윤리(Distancing)》를 개최한다. 본 전시는 이미지, 물질 그리고 인식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고 경험되는지를 탐구하는 케이 이마즈김주리임노식마리아 타니구치의 신작을 소개한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2021년 개관 이후 《지금 우리의 신화》(2023),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2024)와 같은 기획전을 통해 한국 동시대 미술과 국제적 담론이 만나는 장을 지속적으로 확장해왔으며, 본 전시는 그 흐름을 아시아 전반으로 확장하는 시도이다.

《거리의 윤리》는 한 걸음 떨어져 감각하고 두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방법을 제안한다. 여기서 전시장은 거리와 머무름이 하나의 작동 조건으로 설정된 장소가 되며, 시간을 들이고 일부러 물러서는 행위는 감각을 흐리게 하기보다 초점을 조율하는 능동적 과정이 된다. 즉각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대상이 시간과 거리를 통과하며 어떤 상태로 남게 되는지를 환기하는 것이다.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미지와 물질, 그리고 인식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주되는지 탐구해 온 네 작가의 실천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포착되지 않는 감각과 경험의 잔여를 따라가도록 이끈다. 본 전시는 그렇게 시간이 개입하고, 인식이 지연되며, 쉽게 말로 환원되지 않는 순간들을 다루고자 한다. 관객은 작품 사이를 유영하듯 이동하고, 때로는 멈추어 거리를 둠으로써 스스로의 감각을 조정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2월 24일부터 5월 2일까지 한국, 일본, 필리핀 출신의 작가 4인의 신작을 선보이는 단체전 《거리의 윤리(Distancing)》를 개최한다. 본 전시는 이미지, 물질 그리고 인식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고 경험되는지를 탐구하는 케이 이마즈, 김주리, 임노식, 마리아 타니구치의 신작을 소개한다. 타데우스 로팍 서울은 2021년 개관 이후 《지금 우리의 신화》(2023), 《노스탤직스 온 리얼리티》(2024)와 같은 기획전을 통해 한국 동시대 미술과 국제적 담론이 만나는 장을 지속적으로 확장해왔으며, 본 전시는 그 흐름을 아시아 전반으로 확장하는 시도이다.

《거리의 윤리》는 한 걸음 떨어져 감각하고 두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방법을 제안한다. 여기서 전시장은 거리와 머무름이 하나의 작동 조건으로 설정된 장소가 되며, 시간을 들이고 일부러 물러서는 행위는 감각을 흐리게 하기보다 초점을 조율하는 능동적 과정이 된다. 즉각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대상이 시간과 거리를 통과하며 어떤 상태로 남게 되는지를 환기하는 것이다.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이미지와 물질, 그리고 인식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주되는지 탐구해 온 네 작가의 실천은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포착되지 않는 감각과 경험의 잔여를 따라가도록 이끈다. 본 전시는 그렇게 시간이 개입하고, 인식이 지연되며, 쉽게 말로 환원되지 않는 순간들을 다루고자 한다. 관객은 작품 사이를 유영하듯 이동하고, 때로는 멈추어 거리를 둠으로써 스스로의 감각을 조정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전시의 시작에서 마주하는 마리아 타니구치의 작업은 이번 전시가 제안하는 태도를 가장 절제된 밀도로 펼쳐 보인다. 반복되는 벽돌 형상으로 구성된 그의 회화는 특정한 이미지나 서사를 앞세우기보다 화면 앞에 서는 시간 자체를 조율한다. 일정한 크기와 형식, 거의 변주되지 않는 색면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빠르게 읽히기를 거부하며, 해석 대신 머무름의 시간을 요청한다.

벽돌 회화는 작가가 2008년부터 이어온 작업이다. 일련의 화면은 각기 다른 지점에 도달하게 되지만, 모두 같은 기원에서 출발한 하나의 흐름 위에 놓여 있다. 작업은 여러 캔버스를 건너며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의 ‘몸’처럼 지속된다. 〈무제 (Untitled)〉(2026)에서 시간은 반복 행위가 만들어내는 일상적 단위로 쌓이며, 벽돌 하나하나는 특별한 상징이 되기보다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이어진 행위의 흔적으로 남는다. 이 작업은 명상이나 자기 성찰의 은유가 아니다. 규칙을 세우되 결과를 끝까지 통제하지 않는 태도에 기대어 있다. 작가는 일정한 틀을 유지하면서도 우연과 미세한 편차가 스며들 여지를 남겨두며, 여기서 반복은 예측을 유예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의미가 서둘러 고정되지 않도록, 감각이 쉽게 정렬되지 않도록 화면을 천천히 붙잡아두는 것이다.

그에게 회화는 시간, 노동 그리고 신체의 개입이 중첩된 물리적 상태로 존재한다. 축적되는 행위의 밀도만큼 화면은 미세하게 어긋나고 흔들리며, 표면에 남는 미세한 불규칙과 요철은 반복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신체적 소모와 시간의 누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타니구치의 작업을 마주한 관객은 앞뒤로 제자리 걸음을 걸으며 닿을 듯 멀어질 듯 끊임없이 초점과 거리를 맞추게 되고, 시선은 깊이 내재된 의미나 서사의 해독보다 머무르고 있는 지금의 감각과 박동, 그리고 시선의 흔들림으로 서서히 기울어진다.

타니구치의 작업이 관객의 몸과 시선을 조율하는 기준점으로 작동했다면, 이어지는 김주리의 작업은 그렇게 조정된 감각을 물질의 영역으로 밀어 넣는다. 물질과 신체, 그리고 공간의 관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호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이 놓인 환경을 다시 인식해 보도록 한다. 

흙, 물, 공기 그리고 노동과 신체적 개입을 통해 형성되는 작가의 작업은 생성과 축적, 소멸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전시장에 놓인다. 전시장 중앙에 고요히 자리한 〈모습 某濕_202602 (Wet Matter_202602)〉(2026)은 완결된 조형물이라기보다 특정한 시간과 조건 속에서 유지되는 하나의 과정에 가깝다. 작품 앞에서 관객은 하나의 장면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물질이 지닌 무게, 냄새, 온도와 질감 같은 부분적인 감각을 통해 시간과 공기의 흐름을 더듬게 된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후각이 먼저 반응하고 몸은 본능적으로 그 근원을 찾지만, 이는 단번에 드러나지 않는다. 빛과 온습도에 감응하며 고정되지 않은 상태로 관객을 맞이하는 〈모습 某濕_202602〉은 감각의 방향을 흔들며 지각을 다시 세운다. 작가는 양가적인 성질을 지닌 재료인 흙(earth)을 주요한 매체로 삼아왔다. 흙은 견고한 구조를 이루는 동시에 쉽게 붕괴하며, 원초적이면서도 찰나처럼 흩어진다. 그는 이러한 물질을 통해 생성과 소멸을 대립되는 개념으로 제시하는 대신 하나의 연속된 흐름으로 다룬다. 전시가 끝나면 소멸할 운명인 이 작품은 주어진 시간 동안 주변의 환경과 감각을 충실히 흡수하고, 관객의 나가는 발걸음과 함께 다음을 기약한다.

한편, 모든 시간을 머금은 듯한 〈desert〉 연작은 이러한 흐름을 또 다른 밀도로 붙잡는다. 작가는 젖음에서 응고로, 생성에서 퇴적으로 흘러가는 생태의 변화를 작품으로써 빚어낸다. 〈모습 某濕_202602〉이 젖은 흙의 현재라면 〈desert〉는 그 다음을 바라본다. 수분이 물러난 자리에는 균열이 남고, 표면은 갈라지며, 층은 부서진다. 〈desert〉는 물질이 지나온 시간의 결을 표면에 품고, 시간은 그 위에 자신을 새긴다. 작가는 이를 단지 자연의 변화로만 돌리기보다, 인간의 흔적이 다시 물질로 돌아가며 형태를 바꾸는 순환의 장면으로 살핀다. 폐벽돌, 부서진 흙, 암석 등의 잔여물을 거두어 부수고, 갈고, 다시 겹겹이 쌓아 올리는 과정은 물질이 남기는 가장자리, 잔존의 단면과 퇴적의 층위를 더듬는 일이 된다. 이는 꺼진 숨을 불어넣으려는 거창한 시도가 아니다. 생성 다음 단계로서의 잔해와 퇴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되, 그 이행의 과정을 작업으로 붙잡는 것이다. 켜켜이 축적된 표면은 무너지고 쌓이며 굳어가는 시간을 돌아보는 자리로 남는다.

〈모습 某濕_202602〉이 내쉬고 들이쉬는 긴밀한 호흡의 상태라면, 〈desert〉는 큰 숨을 들이마신 채 멈춰 선 장면과도 같다. 폐벽돌과 암석, 물, 공기를 부둥켜 안고 응고된 화면 앞에서 관객은 그것이 품은 기억이나 배경을 알지 못하더라도 잠시 발걸음을 늦추며 함께 숨을 고르게 된다. 이렇듯 김주리의 작업은 감각을 자극하기보다 그것이 스스로 반응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곁을 내어준다.

임노식의 회화는 앞선 작업들에서 축적되어 온,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감각을 다시 화면 위로 불러온다. 화면 속 형상은 명확히 드러나기보다 공기 안에서 아스라이 번지며 기억의 잔상처럼 머문다. 그의 방점은 대상이나 풍경을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의 환경 안에 병치된 대상들이 어떻게 서로를 떠받치며 공존하는지, 그리고 그 관계들이 어떤 상태로 감각되는지에 놓여 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는 작가는 산이 깎이고 마을이 조용해지는 변화처럼 눈에 보이는 사건 너머에 남는 흐름과 기류를 오랫동안 응시해 왔다. 그의 회화는 이러한 비가시적인 감각을 관계의 상태로 포착한다.

작가는 대상을 그린 뒤 오일 파스텔로 투명한 층위를 덧입히며 화면을 구축한다. 이때 덧입힘은 단순한 가림이나 소거가 아닌 이미 놓여 있는 관계들을 다시 조정하는 과정이 된다. 대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서로 겹치고 스며들수록 화면에는 다가가거나 물러서는 시점의 문제를 넘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거리와 관계의 밀도가 형성된다. 이로써 그의 회화는 고정되지 않고 감각이 계속해서 재배치되는 상태로 유지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업은 그가 지속적으로 다뤄온 거리의 감각을 또 다른 국면으로 이동시킨다. 이전의 회화가 비교적 원경에 머물렀다면, 〈여주 - 풍경 49 (Yeoju - Landscape 49)〉(2026)에서는 한 발짝 다가선 위치가 감지된다. 형상은 더 이상 흐려지기만 하지 않으며, 화면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등장한다. 각각의 요소들은 서로를 밀어내고 침투하며 불안정한 균형을 이룬다. 이곳에서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비자연, 유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의 경계는 분리되지 않은 채, 맞닿고 얽힌 상태로 놓인다. 대상을 지우는 대신 서로를 침범하게 만드는 그의 회화적 선택은 경계를 흐리는 동시에 그 경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드러운 색면과 번짐 속에 잠복한 날카로운 긴장은 화면을 쉽게 소화하지 못하게 만들며, 어떠한 대상도 명료하게 이름 붙여질 수 없고, 중심과 초점 또한 무력화된다.

작품을 마주한 관객은 더 이상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응시하는 위치에 머물지 않는다. 시선은 화면이라는 경계를 기준으로 끊임없이 교환되고, 안개 낀 선산에서 길을 찾듯 방향을 가늠하며 장면 안으로 서서히 진입하게 된다. 이러한 전환은 거리를 확보하던 태도에서 더 나아가, 경계가 서로 부딪히고 번지는 상태를 마주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 지점에서 ‘거리’는 회피나 관조가 아닌, 세계와 다시 접속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마지막 발걸음에서 마주하는 케이 이마즈의 회화는 전시를 따라 조율되어 온 거리와 감각을 시간과 역사, 그리고 신체의 층위로 확장한다. 그의 화면에서 이미지는 하나의 시간을 공유하는 장면으로 수렴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조건과 서사에서 건져 올린 파편들이 화면 위에 포개지고, 그 중첩이 만들어내는 불안정한 장 안에서 의미는 쉽게 닫히지 않은 채 지속적인 여운을 남긴다. 지나간 시간은 현재의 표면 가까이로 번져 나오고, 회화는 그 스밈과 재배열의 과정을 따라간다.

각각의 회화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드러낸다. 반투명한 면 캔버스 위에 그려진 〈화로와 난파(Hearth and Wreck)〉(2026)에서 이미지는 표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층을 이룬다. 희미하게 비치는 캔버스 너머의 구조가 마치 뼈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침몰한 전쟁 선박의 잔해와 일상의 몸짓을 담은 석조 부조가 나란히 놓일 때, 서로 다른 사건의 무게는 자연스럽게 평준화되고 시간은 침전과 침식의 감각으로 축적된다. 반면, 〈밟는 이, 그녀(She Who Treads)〉(2026)에서는 이미지가 전면으로 떠오른다. 신화적 신체, 산업적 구조물, 식민지 건축에서 차용된 장식적 요소들이 한 화면 안에서 충돌하고 맞물리며, 믿음, 제도, 신체, 권력이 남긴 일련의 흔적들이 화면의 구조로 드러난다.

이마즈가 견인해 오는 신화, 역사, 민담의 이미지는 그의 화면에서 낙원이나 순수한 이상으로 머물지 않는다. 각자 다른 시간과 서사에서 건너온 형상들은 한 장면 안에서 충돌하기보다 서로를 지우지 않게 하는 완충의 거리 속에 놓인다. 투명함과 불투명함, 침식과 고정, 방치와 관리의 결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의 회화는 무엇이 표면에 남고 또 무엇이 흐려지며 잊혀지는지, 그리고 그 편차가 현재의 감각을 어떻게 흔드는지에 주목한다. 이마즈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선후의 질서를 잠시 보류하게 된다. 이미 지나간 시간들이 ‘지금, 여기’와 접속하는 순간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 일련의 작업은 본 전시가 제안하는 ‘거리’의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로 다른 시간과 층위가 한 화면 안에 공존하는 상태를 지속시키는 작가는 그렇게 스며든 시간과 다시 조우하는, 조용한 재회를 그려낸다.

이렇듯 전시는 서로 다른 속도와 밀도를 지닌 작업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따라가도록 구성된다. 관객은 이 흐름 안에서 작품을 ‘읽기’보다 ‘통과’하며 이동한다. 물질에서 신체로, 지각에서 시간으로 이어지는 느슨한 이동 속에서 감각은 서서히 조율되고, 시각은 더 이상 중심적인 감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대개 즉각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해의 속도가 감각의 속도를 앞지를 때, 경험은 종종 생략된다. 속도를 거부하거나 거스르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미 지나가 버린 감각을 다시 따라잡을 수 있는 지점을 더듬어 보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가 말하듯, 지각은 대상을 마주한 뒤에야 덧붙여지는 결론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의 삶 속에서 서서히 형성되는 과정이다. 즉, 우리는 세계를 바깥에서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그 안에 서서 ‘겪는’ 존재라는 것이다. ⟪거리의 윤리⟫는 그렇게 가까워진 세계로부터 잠시 물러서서, 감각이 다시 제 속도를 찾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시간을 들여 바라보고, 숨을 고르고,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Atmospheric image Atmospheric image
    Atmospheric image Atmospheric image
    Atmospheric image Atmospheric image